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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06
  • 이혜련
  • 작성자 : heradm 조회수 : 349

 

 

작가 신가영

 

 

이혜련​​​(李惠鍊​​)

 

 

<유공자 정보>

 

◆ 생년월일 : (1884-04-21)
◆ 사망년월일 : (1969-04-21​​)
◆ 본적 : 평안남도 강서
◆ 주소 : 미국 로스앤젤레스
◆ 운동계열 : 미주방면

◆ 애족장​(2008)

 


 

 

 

 

<공훈록>


이혜련은 평남 강서군에서 서당 훈장인 이석관(李錫觀)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서울의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그후 1902년 9월 3일 만 18세 때 서울 제중원에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鎬)와 결혼하였다.

 

결혼 직후 이혜련은 안창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남편 안창호를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하여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지도하는 한편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안창호는 1909년 2월 미본토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를 합동하여 국민회를 창설하여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만들었다.

 

이시기 이혜련은 남편 도산 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일제에 강점된 이후에도 안창호는 미국과 중국·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아내인 이혜련은 도산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를 지원하기 지속적으로 의연금, 국민의무금, 특별의연금 등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도산은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3·1운동의 발발 소식에 접한 미주지역 한인들은 미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미국민과 미국정부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미주지역의 부인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는데, 하와이에서는 1919년 4월 1일 대한부인구제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으며 미본토에서도 여성들의 단체가 새롭게 결성되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이혜련은 부인친애회를 조직하여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하였다.

 

당시 부인친애회에서는 한 주일에 2일(화, 금요일)은 고기없는[meatless] 날, 한 주일에 하루(수요일)는 간장없는[kanchangless] 날로 정하여 3·1운동으로 인해 고국에서 고통받는 동포들과 함께 하고자 하였다.

한편, 북미주 지역의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와 다뉴바의 신한부인회는 1919년 5월 18일 북미 지역 부인회를 통합하기 위한 통고문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8월 2일 각지의 부인 대표자들이 다뉴바에 모여 발기대회를 열고 합동을 결의하였다.

 

이때 참석한 부인회는 다뉴바의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의 한국부인회, 윌로우스의 지방부인회 등으로 대표들이 참석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을 결성하게 되었다.

 

로스앤젤레스 부인친애회 대표로는 이혜련을 비롯하여 임메불·박순애·김혜원 등이 참석하였다.

 

이와 같이 북미주의 4개 지방 부인단체들이 국민회 중앙총회에 청원하여 1919년 8월 5일 정식으로 대한여자애국단이 결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을 중심으로 국민의무금, 21례, 국민회보조금, 특별의연 등의 모금을 주도하였고, 미국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 지부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2년 중국 상해에서 윤봉길의 투탄의거 직후 남편 안창호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같은 불행에도 불구하고 이혜련은 1933년 5월 9일 대한여자애국단 총부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할 때 더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 옥중에 있던 안창호는 부인 이혜련에게 편지로나마 위안과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1937년 3월 대한인국민회가 로스앤젤레스에 총회관을 건립하면서 이혜련을 중심으로 한 여자애국단에서도 재정적으로 협조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원의 일원으로 중일전쟁 재난민과 부상병들을 돕기 위하여 약품과 붕대를 모집하였다.

 

그럴 즈음 일제는 안창호를 또 다시 체포하여 서대문형무소로 이송시켰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38년 3월 10일 불행히도 순국(殉國)하고 말았다.

 

이처럼 남편인 도산이 순국하였음에도 이혜련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열심히 여자애국단을 통한 항일전에 참여하였다.

 

여자애국단에서는 중국 난민구제를 위해 구제금으로 78달러를 거두어 송미령(宋美齡)에게 보냈으며, 또 송미령의 요청으로 1939년 12월 76달러를 송금하였다.

도산 안창호와 이혜련 사이에는 장남 필립, 차남 필선, 삼남 필영, 장녀 수산, 차녀 수라를 두었다.

 

이들 자녀들도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공격한 이후 항일전에 당당히 참여하였다.

 

이혜련의 자녀들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국방에 협조하기 위해 장남 안필립과 안필선은 민병대에 입대하였다.

조국이 독립된 이후인 1946년 1월 6일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신년도 대한여자애국단 총회가 개최되어 이혜련이 총단장으로 선출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고국과 동포들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다가 86세 생일인 1969년 4월 21일 영면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신한민보(1909. 6. 30, 1918. 8. 15, 1919. 2. 13·4. 22·5. 24·7. 1·10. 18·11. 18, 1920. 3. 16, 1924. 2. 14·9. 11)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8집, 738~739, 739~741면 도산의 아내 이혜련 여사(기러기, 1969.5) 미주 한인여성단체의 광복운동 지원 연구(박용옥, 1994) 280~283, 295면 

공립신보(1909. 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