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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31
  • 김응수
  • 작성자 : heradm 조회수 : 389

 

 

작가 유지환

 

 

김응수​​(金應守)

 

 

<유공자 정보>

 

◆ 생년월일 : (1901-01-21​)
◆ 사망년월일 : (1979-08-18​)
◆ 본적 : 경상남도 통영 統營 大和 43​
◆ 주소 : 慶南 統營 統營 大和 43​
◆ 운동계열 : 3.1운동​

대통령표창​(1995​​)

 


 

 

 

 

<공훈록>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그는 부산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고등과에 재학 중 1919년 3월 11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의 3·1운동 소식이 부산에 전달된 것은 3·1운동 다음날인 3월 2일경으로 이 때 기독교 인사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내 각급 학교에서는 만세시위를 준비해 갔는데, 김응수는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朱敬愛)·박시연(朴時淵)을 비롯한 송명진(宋明進)·김순이(金順伊)·김난출(金蘭出)·박정수(朴貞守)·김반수(金班守) 등 일신여학교 기숙사 학우 1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 때 이들은 부산상업학교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3월 11일 밤을 기해 거사하기로 뜻을 모으고, 3월 10일 저녁에는 기숙사 벽장속에 숨어서 밤을 세워 태극기 50여 매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사일인 3월 11일에는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뒤 오후 9시를 기해 교사 주경애·박시연 등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시내로 나아가 좌천동(佐川洞)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그는 시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시위행렬의 선봉에 섰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 후 그는 일경으로부터 뺨을 맞고 구두발로 차이는 등 모진 수모를 당하면서도 “세살 먹은 아이도 제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운다. 

 

우리들이 우리나라를 돌려 달라고 운동하는데 무엇이 나쁘냐?”면서 당당하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는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3월 12일 피체되어,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가출옥증표(부산감옥, 1919. 8. 17)

범죄인명부

감사장(대한민국국제승인경축통영시민대회, 1948)

부산·경남 3·1운동사(3·1동지회, 1979) 40∼42·102·103면

부산일신여학교 만세운동기념비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179∼181면

국제신문(1972. 3. 1, 1979. 2. 28)

명적표

가출옥자여권(통영경찰서장, 1919. 9. 13)

표창장(통영읍장, 1953)

부산시사(부산시사편찬위원회, 1974) 제1권 1002∼100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