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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2-31
  • 동풍신
  • 작성자 : heradm 조회수 : 394

 

 

작가 이화섭​

 

 

동풍신​(董豊信​)

 

 

<유공자 정보>

 

◆ 생년월일 : (1904​)
◆ 사망년월일 : (1921​)
◆ 본적 : 함경북도 명천 下加 池明
◆ 주소 : 咸北 明川 下加 池明
◆ 운동계열 : 3.1운동​

애국장​(1991​​)

 


 

 

 

 

<공훈록>


함경북도 명천(明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의 하가면 화대동(下加面花臺洞)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에서는 3월 14일 함경북도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중 최대 인파인 5천여명의 시위군중이 화대헌병분견소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한 곳이다.

 

이러한 만행사실을 들은 주민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는데, 이때 박승룡(朴承龍)·김성련(金成鍊)·허영준(許英俊)·김하용(金夏鏞) 등이 주동이 되어, 다시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3월 15일 다시 5천여명의 시위군중이 화대장터에 모였는데, 이때 그는 오랜 병상에 누어있던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董敏秀)는 전날의 시위 때 일제의 흉탄에 동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각오하고, 새옷으로 갈아 입은 후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동풍신의 아버지는 면사무소와 헌병분견소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길주(吉州) 헌병대에서 지원나온 제27연대 소속 기마헌병과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풍신은 현장으로 달려와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통곡하였다.

 

그러나 동풍신이 슬픔을 딛고 결연히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치자 헌병의 발포로 골목에 몸을 숨기고 있던 시위군중은 크게 감동하여 동풍신과 함께 다시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면사무소로 달려가 사무실과 면장집·회계원집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나 동풍신은 결국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악랄한 일본 고문으로도 동풍신의 기개를 꺾지 못하자 경찰은 화대동 출신의 화류계 여성을 동풍신과 같은 감방에 수감하여 동풍신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다.

 

이 말을 들은 동풍신은 몇 번을 기절하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17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사람들은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 칭송하며, 동풍신의 애국정신을 찬양하였다.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여성독립운동사(3·1여성동지회) 39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752·75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