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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1-08
  • 최용신
  • 작성자 : heradm 조회수 : 207

 

 

작가 박야일

 

 

최용신​​​(崔容信)

 

 

<유공자 정보>

 

◆ 생년월일 : (1909-08-12)
◆ 사망년월일 : (1935-01-23)
◆ 본적 : 함경남도 덕원 縣 斗南
◆ 주소 : 京畿 華城 半月 泉谷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애족장(1995​​​)

 


 

 

 

 

<공훈록>
 

함남 덕원(德原) 사람이다.

 

식민지 수탈에 의해 피폐된 농촌사회의 부흥을 위해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그가 농촌사업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1928년 함남 원산의 루씨여고보(樓氏女高普)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協成女子神學校)에 재학하면서부터 였다. 

 

이 때 그는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는 생각에서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협성학생YWCA)의 대표로 참가한 그는 본격적으로 YWCA의 농촌계몽사업에 참가하였다. 

 

1923년 창립된 조선 YWCA가 도시 중심의 활동을 펴다가 농촌계몽사업에 뛰어든 것은 1927년경부터였다. 

 

당시 조선 YWCA는 피폐된 식민지 농촌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활동의 중심을 농촌으로 옮겨갔다. 

 

YWCA의 농촌사업은 농민의 의식계몽을 위한 농촌강습소와 야학 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는 이러한 YWCA의 농촌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1929년에는 황해도 수안(遂安)과 경북 포항에 파견되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31년 10월 YWCA 파견교사로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반월면(半月面) 천곡(泉谷;샘골)에 파견되었다.

 

그는 예배당을 빌려 한글·산술·재봉·수예·가사·노래공부·성경공부 등의 학습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최용신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현지 주민의 몰이해로 인한 냉대와 질시를 감내해야 했고, 일경의 감시와 탄압 또한 이겨내야 했다.

 

그리고 학원 운영을 위한 재정 지원의 마련도 여의치 못하였다.

 

그렇지만 최용신의 헌신적 노력으로 현지 주민의 이해를 얻어낼 수 있었고, 어려운 중에도 학원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YWCA와 현지 유지의 기금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강습소는 1932년 5월 정식으로 강습소 인가를 받았으며, 동년 8월에는 천곡학원(泉谷學院) 건축발기회를 조직하고 그곳 유지와 YWCA의 보조로 학원 건축을 시작하여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1934년부터 YWCA의 보조금이 끊어지게 되자 천곡학원의 운영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이 학원을 살리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을 강구하던 중 1935년 1월 23일 지나친 과로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그의 농촌을 살리기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熏)의 소설 『상록수(常綠樹)』에서 실재화되어 농촌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신가정(1935. 5월호) 98∼105면

여론(1934. 10월) 제11호, 농민의 하소연(최용신)

최용신소전(유달영, 1939)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회록(1929년도 정기회의)

최용신양의 생애(유달영, 1956)

조선일보(1928. 4. 1)